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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우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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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우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와 해방 후 미군정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활동한 인물이다.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 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일본 유학 후 조선총독부 관료가 되어 평안북도 군수,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전라북도 지사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경무국장 직무대리를 거쳐 경상북도 지사로 유임되었으나, 친일 혐의로 해임된 후 공금 횡령 혐의로 도주했다.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공민권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5·16 군사 정변 이후 민주당 관련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 일제강점기 활동

김대우는 1925년 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 관리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 친일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1]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평안북도 박천군 군수(1928), 평안북도청 내무부 산업과장(1930)을 거쳐 1936년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 되었다.[1] 그는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1937년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송하고 모든 서적에 싣도록 강요하였다.[1]

1939년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금융조합연합회 전남 감리관 등을 역임하고, 1940년 경상남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을 거쳐 1943년 전라북도 지사가 되었다. 전북 지사 시절에는 징용을 관장하는 근로동원원호회 지부장을 겸임했다.[1] 1945년 6월에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1]

김대우의 빠른 승진은 일제에 대한 특별한 충성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1] 이항녕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우는 경남 산업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군별로 공출미를 강제로 할당하고, 보고된 재고량을 불신하며 할당량을 늘려 수탈을 조장했다고 한다.[1]

2. 1. 초기 활동 (1918~1925)

191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에 입학했다.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 2학년 재학 중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김대우는 탑골 공원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경성공전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로 진학했다. 1925년 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 관리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는 유명한 친일파 관료가 되었다.

2. 2. 관료 생활 (1925~1945)

김대우는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평안북도 박천군 군수(1928), 평안북도청 내무부 산업과장(1930)으로 승진했다.[1]

1936년 총독부 학무국의 사회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민화 정책의 첨병인 이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1] 김대우는 이 직위에 근무하면서 1937년 학무부 촉탁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기, 제창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하였다.[1]

1939년에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금융조합연합회 전남 감리관, 전남 방공위원회 위원, 광주 사상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에 임명되었고, 1940년 경상남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을 거쳐 1943년 전라북도 지사에까지 올랐다.[1] 전북 지사를 지낼 때는 징용을 관장하는 근로동원원호회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1]

김대우의 빠른 승진 비결은 일제에 대한 특별한 충성이었다는 분석이 있다.[1]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내고 광복 후 여러 차례 당시의 행적을 참회한 이항녕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경상남도 하동군 군수로 있을 때 경남 산업부장으로 근무하던 김대우가 군별로 공출미를 강제로 할당한 것은 물론, 보고된 재고량을 못 믿겠다며 할당량을 터무니 없이 늘려 수탈을 조장한 바 있다고 한다.[1] 이렇게 승진을 거듭하던 김대우는 태평양 전쟁 종전 두 달 전인 1945년 6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1]

3. 해방 이후 활동

미군정 경북지사로 근무할 때 공금 3만원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1946년 2월 업무상횡령혐의로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조사부에 소환되었으나 곧 도주했다. 이후 1946년부터 도피 생활을 하였고, 지명수배되었지만 곧 흐지부지되었다.[1]

3. 1. 미군정 시기 (1945~1948)

광복 직후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 절차를 위한 송진우, 안재홍 등 조선인과의 협상에 참가했으며, 경상북도지사에 유임되었다.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수완가였고, 그의 유임은 의심할 것 없이 지방 정부에서 가장 큰 효율을 촉진시키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9월 2일 이후 미군정이 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그도 계속 경북 지사로 근무하다가 10월 19일에야 미 군정 도지사의 고문으로 물러났다.[1]

미군 제40사단과 서울의 군정은 김대우의 유임을 주장하였다. 제40사단의 지원으로 김대우는 경상북도 내 각 군과 다른 지역의 관리들을 해임, 파면했는데, 일본인들을 제거하고 조선인들을 지명했다. 그러나 인사 교체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10월 11일 미군정으로 보고가 올라갔고 그는 곧 친일파라는 평판을 이유로 해임되었다.[1]

미군정 경북지사로 근무할 때 공금 30000KRW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1946년 2월 업무상횡령혐의로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조사부에 소환되었으나 곧 도주했다. 1946년부터 도피 생활을 하였고, 지명수배되었지만 곧 흐지부지되었다.[1]

3. 2. 정부 수립 이후 (1948~1963)

1948년 5월 10일 초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9월 2일 반민특위 재판관 곽상훈에 의해 공민권 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다.[1]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났고 공민권 정지 3년형 외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951년 일본인이자 전 조선총독부 관료로 조선에서 지방관을 역임한 고시진이 비밀리에 부산에 방문, 장택상과 만났다가 족청계의 폭로로 장택상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김대우는 고시진의 밀입국과 부산 밀항에 관련되어 1952년 9월 28일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 10월 22일 구류 기간이 만료되었으나 다른 이유로 계속 구속되었고 김대우는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 장준택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항소하였다. 1953년 2월 8일 불기소 및 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6월 22일 그가 민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것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장면 당시 민주당 대표가 그의 입후보를 권고하고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1961년 7월에는 5.16 군사 정변 직후 군정이 민주당 정권 관련자들을 용공으로 몰아 재판할 때 그가 민주당 각료들을 도와 일본 약품을 밀입수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4. 사후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그의 동생으로 경찰 관료를 지낸 김호우도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슬하의 7남매 중 차남인 김광연은 송도병원 원장을, 막내 아들 김광순은 한국하우톤 회장을 지내는 등 자손이 번창했고, 이들은 김대우를 평범한 공무원이며 올곧은 선비로 기억하고 있다.[2]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들김광연1929년의사, 대장항문의, 서울송도병원 원장 역임
며느리이영희
아들김광순
김숙연
동생김호우1947년 목포경찰서장 역임


참조

[1] 서적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07-28
[2] 뉴스 "조선일보 제호 쓴 분의 글씨죠" - 김광연씨네 7남매, 서예가 김돈희씨 작품 본사 기증 http://www.chosunilb[...] 조선일보 200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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